김주환
커리어 첫 피아노-보컬 듀오 프로젝트 시도한 11번째 정규앨범 <After Midnight>
최소한의 편성 통해 마침내 터득한 절제미
재즈 보컬이란 과연 무엇일까? 기존의 팝, 록 등 대중음악 가수들과 비교해 어떤 점이 과연 다른 걸까? 이 질문은 제가 재즈관련 글을 쓰고 음악을 소개하는 일을 해오기 시작하던 시기부터 지금까지 계속 접해왔습니다. 매번 그 질문을 들을 때마다 난감함이 밀려왔지만 그럼에도 제 나름의 기준으로 설명해드리곤 했는데, 여기에서 스스로 생각하는 가장 중요하고 핵심적인 기준 두 가지를 우선적으로 언급해볼까 합니다. 우선 기존 팝 보컬리스트들과는 다른 여유로운 레이드 백(Laid Back)과 루바토의 탑재 여부, 그리고 확실한 스윙감의 체득 유무입니다. 이 두 가지가 갖춰졌을 때 비로소 기존의 팝 보컬리스트들과는 다른 미감과 표현력이 생겨나기 시작하며 여기에 비밥 스케일이나 그 뉘앙스가 가미된 접근까지 가세하면 흠잡을 데 없는 전형적 재즈 보컬이 연출되게 되죠. 그럼 레이드 백이란 무엇일까요? 이는 구체적인 이론이라기보단 노래를 할 때, 혹은 연주를 할 때 뮤지션이 음과 리듬을 다루는 태도, 방식이라고 할 수 있는데 이완된 상태에서 음을 여유롭게 다루는 것을 기본 전제로 합니다. 특정 곡의 멜로디를 소화할 때 정해진 템포와 음정을 곧이곧대로만 부르지 않고 자신의 무드를 반영해 때론 음을 살짝 첨가하거나 높이를 다르게도 하고, 때론 타이밍을 살짝 누그러뜨리게도 하는데 이걸 시도할 때 필연적으로 루바토와 레가토적인 접근을 갖고 가게 되죠. 결국 이걸 얼마나 어색하지 않게 하나의 곡 안에서 자신의 보컬 역량과 감성을 바탕으로 잘 연출해낼 수 있는가? 여기에 뛰어난 스윙감을 계속 머금은 상태로 노래를 지속할 수 있는가를 핵심적으로 살펴봐야 합니다.(세간에는 이 부분이 없거나 미약한데 재즈 보컬리스트로 잘못 소개되는 경우가 종종 있습니다만 이 요소들이 없다면 재즈 보컬로 이야기해선 안됩니다) 사실 여기에 확실한 정답은 없으며 연주자 각자의 센스와 감각으로 그들 나름의 완성도를 만들어내고 잘 표현해내는 게 중요한데, 이걸 모두 체득하고 있는 가수라면 뛰어난 스탠더드 재즈 보컬리스트라는 타이틀을 부여하기에 하등 부족함이 없게 되죠. 김주환에겐 바로 이게 있습니다. 그것도 앨범을 낼 때마다 매번 발전해나가는 면모가 보이는 중입니다.
새로운 도전위해 그가 바라본 지점
그가 선보였던 지난 두 장의 정규앨범 2020년도 발매작 <My Funny Valentine ; Kim Ju Hwan Sings Richard Rodgers Songbook>, 2022년 발매작 <Candy ; Memories of Nat King Cole Trio>는 바로 이런 스탠더드 재즈 보컬리스트로서 그가 가진 진면목을 에누리 없이 드러내 보인 ‘한국 재즈 보컬의 수작’이었습니다. 우선 앨범 레퍼토리에서부터 작곡가 리처드 로저스와 피아니스트이자 보컬리스트 냇 ‘킹’ 콜의 애창 스탠더드 넘버들을 중심으로 선곡을 했고 이 곡들을 노래하는 과정에서 일말의 어색함 없는 레이드 백과 스윙감을 표현해냈죠. 이런 그가 자신의 행보에 한층 더 확신을 갖고서 도전하려는 다음 시도는 바로 피아노-보컬 듀오 편성입니다. 재즈 역사에 아주 흔하지는 않지만, 그렇다고 그리 드문 것도 아니며 엘라 피츠제럴드, 토니 베넷, 멜 토메, 냇 ‘킹’ 콜, 카르멕 멕레 등 여간한 명창들은 최소한 한차례 이상 이 편성으로 앨범을 만들었던 바 있는데, 김주환이 여기에 도전장을 내밀었습니다. 기존의 리듬 파트가 가미된 캄보 편성으로 노래할 때보다 더 섬세하고 디테일한 표현및 정교하면서도 잘 다듬어진 음 선택을 시종일관 해야할 필요가 있는 이 편성은 피아노와 보컬 양쪽 모두 잘 소화해내기가 상당히 어렵습니다. 음악적으로 준비도 잘 되어야 할뿐 아니라 서로간의 음악적 궁합이 필수적으로 좋아야 하는데, 보컬과 피아노 모두 각자의 영역을 지킴과 동시에 상호 교감도 적절하게 잘 이끌어내어야 의미 있는 결과를 만들어 낼 수 있죠. 반면 누군가 조금이라도 과하게 자신을 드러내거나 혹은 반대로 소극적으로 일관하면 듀오의 밸런스는 바로 깨지게 됩니다. 그런 이유 등으로 지금껏 국내 보컬리스트들이 이 피아노-보컬 듀오 편성으로 작업한 결과물이 한 손에 꼽을 정도이며 더욱이 남자 보컬리스트로서는 김주환이 앨범 단위 작업으로 국내 처음입니다.
김주환은 이번 작업을 위해 이전 리처드 로저스 송북때 함께 작업했던 일본의 재즈 피아니스트 유키 후타미(Yuki Futami)를 선택했습니다. 개인적으로 상당히 적절한 선택이라고 보는데 이미 리처드 로저스 송북 시기부터 앨범 작업에 참여하는 등 음악적 교류가 있어와서 김주환이라는 가수에 대한 파악이 잘 되어 있는데다, 연주자 자체가 유려하고도 자연스러운 스윙감과 수준급 레이드 백, 루바토 구사능력, 풍부한 스탠더드 레퍼토리의 이해를 확실히 갖추고 있으며, 더불어 보컬리스트와의 반주에서 어떤 점을 우선시하여야할지 여러 경험을 통해 잘 알고 있기 때문입니다. 앞서 언급했듯 반주자라고 해서 그저 소극적인 컴핑으로만 일관하면 그 듀오는 무조건 실패할 수밖에 없는데, 유키 후타미는 보컬을 때론 독려하고 이끌며, 때론 자신이 한발 물러설 줄 아는 그 지점을 잘 파악하고 있는, 센스와 경험치를 겸비한 연주자라고 할 수 있죠.
이렇게 맞춤한 피아니스트를 선택하고 그와 함께 작업할 것을 결정한 뒤 김주환은 자신이 좋아해왔지만 지금껏 앨범에 담아내지 못한 10곡의 스탠더드들을 별도로 고르고, 이 곡들을 하나하나 함께 피아니스트와 의견을 교환하며 곡 해석을 어떻게 할지 고민해 작업을 해나갔습니다. 특히 김주환은 다른 어떤 때보다 이번 보컬 녹음이 힘들었다고 고백한 바 있는데 녹음을 전체 다 해놓고 나서 마음에 안 들어서 보컬 파트만 다시 뒤엎고 재녹음을 할 만큼 고민을 거듭해 작업을 했다는 후문입니다. 이미 10장이나 앨범을 만들어낸 경험을 갖추고 있지만 오직 피아노와의 듀오로 앨범전체를 만드는 건 전작과는 완전히 다른 종류의 부담을 주었으며 또 곡마다 어울리는 표현을 담아내기 위해 신경을 쓰다 보니 스트레스가 이만저만 아니었다고 하네요.
수록곡에 관하여
앨범의 첫 곡 I Thought About You 에서부터 산뜻하면서도 여유로운 유키의 피아노 인트로가 곧바로 호감을 주는데 이어 흘러나오는 김주환의 노래가 어딘지 이전과 미묘하게 달라진 것 같이 들립니다. 뭐가 달라진 것일까? 두 번째 트랙 A Nightingale Sang in Berkeley Square과 이어지는 Always 를 이어 들으면서야 비로소 달라진 점을 파악할 수 있었는데 바로 노래할 때 소리를 안으로 일부 머금으면서 동시에 호흡 또한 가급적 이완되고 길게 가져가며 노래하고 있었습니다. 그와 함께 감성적인 표현은 전면에 드러내려 하지않고 절제된 면을 중심에 두고 있죠. 하나의 곡이 중반부를 지나 클라이맥스로 넘어가는데도 그는 소리를 여간해선 시원하게 내지르지 않고 안으로 삭이고 수렴된 표현을 유지하면서 차분하고 담담하게 노래합니다. 이에 대해 김주환은 전작인 <Candy>를 작업하고 나서 활동을 해나가다 좀 더 음을 머금으며 여유를 갖고서 음미하듯 노래하는 것에 대해 포커스를 두게 되었고 절제를 통한 깊은 감정 표현을 어떤 식으로 해야 되는지에 대해 고민해왔다고 합니다. 그 과정에서 자신이 평소 좋아해온 샌디 스튜어트(Sandy Stewart) 같은 가수들의 보컬 접근을 통해서 영감을 강하게 받았다고 하는데 이번 앨범의 가장 큰 음악적 포인트는 바로 여기에 있다고 할 수 있을 거에요. 그리고 아마 이 점 때문에 그의 노래를 평소 좋아해온 분들께서도 처음엔 이전과 같은 인상을 받지 못하실 수 있습니다만, 그렇기에 개인적으로 반드시 두 차례 이상 작품을 반복해 들어보시길 권하고 싶습니다. 그렇게 할 때 이번 앨범에서 그가 하고자 한 보컬 표현의 맛을 더 선명히 이해하고 음미할 수 있을 거라고 봅니다. 한편 이런 기조는 이후 트랙에서 계속 이어지는데 필자의 귀엔 그중에서 It Had to Be You 와 That Old Feeling 가 귀에 잘 와닿습니다. 김주환의 감정표현도 그렇고 유키 후타미의 피아노가 능동적이면서 또 한편 서포터로 반주의 기본 미덕을 잘 보여주고 있다는 생각이 들어요.
한편 레너드 번스타인 작곡인 8번째 트랙 Lucky to Be Me에 이르러서는 김주환이 가진 예전의 시원하고 거침없는 발성이 가감 없이 드러나 있습니다. 아마도 이 곡의 경우는 마냥 내부로 수렴해 불렀을 경우 전체적인 느낌이 잘 살아나지 않았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드네요. 하여 좀 더 직접적인 감정을 드러내고 목소리의 생기를 숨기지 않고 전면에 끌어내면서 어느 정도 내지르는 구간이 담겨야 곡의 매력이 배가된다는 걸 파악하고 다른 트랙들과는 다른 어프로치를 가져간 게 아닐까 싶습니다. 개인적으로는 이어지는 블루스 필 가득한 넘버 Willow Weep for Me 에서도 전 트랙과 비슷한 접근을 조금 더 가져갔으면 어땠을까 싶었는데 김주환은 다시 이번 앨범의 주 컨셉트로 돌아가 수렴된 상태로 노래합니다. 이곡에서는 어택이 상대적으로 강하게 연출되고 있는 유키 후타미의 블루지한 피아노 타건이 특히 훌륭하며 여기에 대비되는 김주환의 보컬, 타이트하게 앞으로 당겨진 상태에서 내지를 듯 내지를 듯 마지막까지 좀체 내지르지 않는 그의 목소리, 곡의 끝부분 소박한 스캣에 이어지는 여유로운 페이드 아웃까지 실로 매력적인 감정선을 보여줍니다.
이어지는 앨범의 마지막 트랙 미셸 르그랑의 명곡 You Must Believe in Spring 은 그의 영웅인 토니 베넷과 빌 에번스 듀오 버전을 연상케 하는 부분이 보이는데, 다만 김주환은 감성적으로 좀 더 습윤하고 애처로운 느낌을 드러내고 있으며 유키의 피아노는 오히려 반대로 다소 외향적인 면을 드러내 묘한 음악적 대비감을 전해준다는 생각이 드네요.
김주환은 재즈 보컬리스트이자 고전 스탠더드에 대한 확고한 애정과 확신으로 지금껏 흔들림없이 자신을 담금질하고 채칙찔 해왔죠. 스스로에게 끊임없는 미션을 던져주고 이를 성취하고자 한결같이 노력하는 김주환의 모습은 지난 10장의 앨범을 통해 우리에게 이미 확인되었으나, 그는 여전히 더 위로 올라가려고 하고 있으며 자신에게 여전히 적지 않은 가능성이 존재하고 있다는 걸 믿어 의심치 않습니다. 음악가로서 이러한 도전적인 자세는 무조건 필요불가결하며 향후 자신을 업그레이드하는데 가장 큰 동기부여로 작용합니다. 그의 이번 미션은 바로 피아노-보컬 듀오였으며 이 작업을 통해 그는 이전과 또 다른 예술적 비경을 맛보았고 또 직접 경험했습니다. 그게 가능할 수 있었던 것은 좋은 음악적 파트너 유키 후타미의 멋진 피아노 반주, 맞춤한 서포트가 1차적으로 있었기 때문이며 또 그에 멋지게 호응해주고 자신의 보컬 세계를 새롭게 일신한 김주환의 진취적인 시도까지 함께 어우러졌기 때문입니다. 두 사람이 함께 주고받는 긴밀하고도 여유로운 감성선율과 리듬! 여기 담긴 10곡의 음악들은, 이 앨범 제목처럼 늦은 밤 어찌할 수 없는 각자만의 이유로 잠 못 이루는 여러분들을 위한 훌륭한 동반자가 되어줄 수 있을 겁니다.
글 / MMJAZZ 편집장 김희준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