Luca minor [Curse of romanticism]
‘낭만주의의 저주’라는 도발적인 앨범 타이틀이 먼저 눈에 띈다. 막상 앨범을 재생해보면 저주보 다 낭만 쪽에 방점이 잔뜩 찍힌 사랑 노래가 가득하다. 바로 그 달콤한 사랑의 순간이 곧 다가올 멸망을 예고하는 저주라도 된다는 걸까? 그런데도 이 낭만을 고스란히 품겠다는 걸까? 낭만(浪漫) 이란, 로망(ろうまん)이란, 로맨스(romance)란 늘 그렇게 저주와 축복을 양손에 꼭 쥐었다가 무엇 이 먼저일지 모르게 풀어놓으며 제물을 껴안는다.
문예사에 있어 낭만주의는 계몽주의, 고전주의에 대한 반격으로 등장했다. 모든 삶과 예술이 일정 한 법칙을 따르는 것처럼 보이고, 이성과 비이성의 전쟁에서 이성이 승리했으며, 인간성에 진정한 자유가 주어졌다는, 아름다움에도 형식이 있다는 믿음이 팽배해졌을 때, 사람들의 감정이 갑자기 폭발했다. 미학이 자유롭게 튀어 나갔다. 예술가들은 신경증과 우울에 시달렸고, 음악가들은 밖보 다 내면을 더욱 들여다봤다. 이 시기, 자신의 작품이 낭만주의 음악가들에게 두루 선택된 낭만주 의의 시인, 그러나 역설적이게도 낭만주의를 비판하고 풍자했던 하인리히 하이네(Heinrich Heine) 는 말했다. ”낭만주의는 몽유병에 빠진 중세 시가의 부활이며, 히죽거리는 유령들이 깊고 비통한 눈길로 우리를 바라보는 악몽의 절정”이라고.
[Curse of romanticism]는 올해 제20회 자라섬 재즈 페스티벌의 라이징 페스티벌 무대에 오른 작 곡가이자 싱어송라이터 Luca minor의 첫 정규앨범이다. 각박한 일상 속 실용과 현실성, 가성비와 짧은 즐거움을 우선하는 게 당연해진 시대다. 젊은 음악가는 스포티파이나 각종 플레이리스트에 어떻게 오를지, 숏폼 콘텐츠를 어떻게 제작할지 고민하는 게 훨씬 생산적으로 보일 법한 바로 이 시기에, Luca minor는 싱글 대신 11곡짜리 정규앨범을 준비했다. 주제와 가사에 있어 경수필 형태 의 신변잡기가 범람하는 유행도 의식하지 않았다. 그저 마음 한편에 감춰둔 사랑의 기억과 단편 들을 끈질기게 파고 들었고, 이를 스스로 사랑해 마지않는 팝 스탠더드 스타일의 재즈 발라드로 농염하게 소화했다.
한 곡을 제외하고 Luca minor가 전곡 작사, 작곡한 앨범의 수록곡은, 여름과 겨울을 오가며, 실제 계절과 사랑의 계절이 교차한다. 흑백과 녹음(shade of a tree)을 오가는 음반 북클릿 이미지처럼, 화자는 창백한 흑백의 겨울을 몇 차례 경험했지만, 여전히 햇살 비치는 여름에 머물며 (비록 그 햇살이 영원하지 못할 거라는 걸 알면서도(‘Ephemeral sunshine’)) 이루어지지 못할 기적을 노래한 다(‘Christmas miracle’). 담담히 사랑의 바보를 자처한다(‘Foolish heart’). 말하자면 [Curse of romanticism]의 러브 스토리는 현실 모르는 철부지의 첫사랑 이야기가 아니라, 로맨스의 저주가 선사한 슬픔과 고통을 마주한 이의 따듯한 고백이다. 마치 여성 콘트랄토처럼 얇고 부드러운 서 정을 겸비한 Luca minor의 보컬은 단출한 편성 속 직접 연주한 피아노와 기타, 은은하게 이야기 를 감싸는 동료들의 악기 사운드와 어우러지며 역경과 슬픔 속 사랑의 회귀를 기다린다.
앞서 말했듯 Luca minor의 낭만주의는 현재의 이상(ideal)이나 언어와 무관하다. 추구하는 가치와 감성만이 아니라 음악마저 차분한 쿨과 달콤한 스탠다드 재즈, 때때로 가곡(‘다시 겨울’)의 뉘앙스 를 머금은 채 고전과 모던, 고풍(old-fashioned)의 가치를 두루 곱씹는다. 차가운 현실과 슬픈 이
별 앞에서 혹여 패배하거나 그것을 돌이킬 수 없는 것을 알면서도 묵묵히 음악과 사랑을 노래한 다. 설사 그것이 한 손에 저주를 쥐었음을 안다고 해도 낭만의 포옹을 거부하지 않는다. 사람의 생은 유한하고, 사랑에도 유통기한이 있으며, 유행과 예술사조는 돌고 돈다. Luca minor의 다음 앨 범 역시 로맨틱할까? 반대로 여전히 몽유병에 빠져 허우적거리고 있을까? 어찌 되든 상관없다는 데 동의한다면, 여전히 이 음악이 아름답다면, 우리는 모두 같은 저주에 걸린 거다.
- 대중음악평론가 정병욱
0